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에니 전쟁 (문단 편집) == [[제2차 포에니 전쟁]] (BC 218년~BC 201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제2차 포에니 전쟁)]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여기에는 간단히 서술한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정치력인 영향력을 많이 잃은 [[하밀카르 바르카]]는 자원해서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던 그는 이주 8년째에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니, 그 뒤를 사위인 [[하스드루발]]이 이어받아 7년간 통치했다. 이 시기에 [[로마]]는 카르타고의 이베리아 진출을 경계하여 [[하스드루발]]과 접촉해 [[에브로 강]]을 경계로 더이상 세력을 뻗지 않도록 강요하는 조약을 맺었다. 그 후 하스드루발이 암살당하자 그의 뒤를 하밀카르 바르카의 장남인 27세의 '''[[한니발 바르카]]'''가 이어받았다. 당시 로마는 사군툼이라는 명목상의 동맹국(사실상 속국)을 내세워 에브로 강 서쪽으로 진출해 카르타고를 압박했고, 결국 한니발은 집권 2년에 사군툼에서 카르타고계 시민 및 친 카르타고파 인사들이 살해당한 사건을 명분으로 삼아 사군툼을 포위했다. 이때 로마는 사군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북이탈리아에서 갈리아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중이라 당장 군단을 파병할 여력이 되지 않았고, 대신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이 사절들은 한니발로부터 철수하겠다는 대답을 받지 못했다. 이에 로마 사절들은 직접 카르타고 본국으로 가서 한니발을 사군툼에서 철수시키든지 아니면 로마와 전쟁을 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카르타고 원로원 의원들은 전쟁을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대답했고, 이에 로마는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했다. 한니발은 로마가 선전포고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군툼을 점령한 다음 그곳 주민 모두를 노예로 팔아버렸다. 로마 원로원은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에게 군사를 주어 스페인 원정을 결정했지만, 한니발은 스페인에서 앉아서 기다리기는커녕 군대를 편성하여 북상했고, 이에 로마군은 한니발 군대에 맞서기 위해 당시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 마살리아(현재 마르세유)에 주둔하며 한니발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니발은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이탈리아로 진입한다는, 당시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진군을 감행했다. 역사상 최초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은 로마군의 허를 완전히 찌르는 데 성공했으며 이에 놀란 로마는 마살리아의 스키피오와 또 다른 집정관이자 시칠리아에 주둔 중이던 셈프로니우스를 급하게 소환해 한니발를 저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니발은 이탈리아 북부 트레비아 강 부근에서 로마 추격군을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울 정도로 격파해버렸다. 덕분에 한니발은 로마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눈치만 보고 있었던 북부 갈리아 부족을 새로운 지원세력으로 만들어 이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이며 군사력을 보충할 수 있게 되었다([[트레비아 전투]]). 로마는 플라미니우스와 세르빌리우스를 새로운 집정관으로 임명하여 군단을 내어주었고 이들은 각각의 군단을 이끌며 한니발이 남하할 서쪽과 동쪽의 가도를 봉쇄했다. 한니발은 이 두 가도 중 하나를 골라 남하하는 대신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그 사이의 가운데 늪지대를 통과하기로 결정한 후, 3박 4일간 휴식도 수면도 없는 초강행군을 벌여 이 늪지대를 로마군이 눈치채기 전에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합류한) 갈리아군과 대부분의 전투 코끼리들을 잃고 한니발 자신도 한쪽 눈이 완전히 실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강행군의 결과, 카르타고군은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 아무런 피해없이 진입해 지리적인 이점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이렇다 할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한니발군은 거리낌없이 약탈을 벌이고 농지를 불태우면서 돌아다녔다. 로마 평민층의 지지를 얻던 플라미니우스는 지지층의 호소에 응답하기 위해 한니발군을 빠르게 전멸시켜야 한다는 초조함을 느끼게 되었다. 한니발은 이러한 심리를 역이용해 트라시메노 호수에 기지를 세워 주둔한 척한 뒤 추격해온 플라미니우스의 군단을 매복작전으로 궤멸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플라미니우스도 전사했다([[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 이 승전 덕분에 한니발군은 이탈리아 남부까지 방해물 없이 진격할 수 있었고, 로마 원로원은 지구전법론자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군단을 맡겼지만 로마 시민들은 그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집정관 선거에서 적극론자인 바로를 선출했다. 새로운 집정관인 바로와 파울루스는 무려 86,000명에 달하는 로마 군단을 조직했다. 한편 한니발은 그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탈리아 남부로 남하하여 로마군의 군량 보관소가 있는 칸나이에 진입했다. 이에 두 집정관은 대군을 이끌고 칸나이에서 한니발과 대규모 회전을 벌였다.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전쟁사에 남을 기발한 기병, 보병 간의 유기적인 조합으로 로마군을 포위하여 그들을 섬멸해버렸는데 이 전투는 오늘날까지도 역사상 가장 완벽한 포위섬멸전으로 평가된다. [[망치와 모루 전술]]을 설명하는 교범에는 백이면 백, 칸나이 전투를 예시로 들 정도이다. 이 싸움에서 한니발의 병력은 50,000명 남짓으로 로마군보다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2배에 가까운 적군을 오히려 거꾸로 포위해서 [[전멸]]시켜 버렸다. 전투 결과 약 50,000명이 전사하고, 20,000명이 포로라 잡힌 로마군과는 달리 한니발의 피해는 사상자 5,000명 남짓에 불과한 일방적인 대승리였다. 칸나이 전투의 여파는 엄청나서 눈치를 보고 있었던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가 한니발과 동맹을 맺었고, 로마 동맹시의 제2인자였던 [[캄파니아]]의 '''[[카푸아]]'''와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계 폴리스의 맹주격이던 '''[[타란토|타렌툼]]''' 등 남이탈리아 방면 로마의 동맹시들도 한니발 편에 붙기 시작했으며, 시칠리아 섬의 강국인 '''[[시라쿠사]]'''도 로마와 동맹을 끊고, 카르타고에 붙었다. [[칸나이 전투]] 문서로. 칸나이 전투 이후 한니발이 군사적 천재이며 그를 상대로는 대규모 회전으로 승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뼈저리게 느낀 로마는 더 이상 한니발과 정면으로 회전을 벌이는 것은 포기하고, 파비우스가 주장한 대로 지구전법, 즉 게릴라 전법 + 초토화 전법을 쓰기로 결정했다. 다시 말해 당시 지중해의 초강대국이며 상비군만도 100,000명 - 잠재적인 가용 병력까지 포함하면 수십만 명- 에 달하는 로마가 원정군이라 보급도 안 되고 병력 충원도 어려운 30,000명의 한니발 군대에 맞서려고 자기 땅을 불태우며 파괴하는 [[청야전술]]을 썼다는 것이다. 그 후 10년간 로마와 한니발은 전면대결 없이 지루한 소모전을 계속했다. 한니발은 온갖 계책을 써서 로마군을 전장으로 끌어 들이려 했고, 성공할 때마다 전투의 승자는 한니발이었다. 하지만 한니발이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이 절실했고, 다른 카르타고 지휘관들이 하나같이 무능했기 때문에 한니발 외의 카르타고 군대는 연전연패했다. 여기에 카르타고 본국도 계속해서 터지는 반란과 히스파니아 원조 때문에 한니발에게 제대로 보급을 해줄 수 없었다. 게다가 로마 해군이 결사적으로 카르타고의 보급선을 저지하면서 한니발을 말려 죽이려고 들었다. 반면 로마군은 본토에서 싸우기 때문에 계속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으며 제1차 포에니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시민들이 일치 단결해 한니발에 맞서는 무서운 결속력을 보여주었다. 한니발이 노렸던 로마 동맹체제의 붕괴는 결국 실패했는데 이것은 그의 예상보다도 로마 동맹체제가 훨씬 견고했던 것과 한니발 외에는 사실상 적수가 없었던 강력한 로마군이 동맹을 유지한 도시를 지지하고, 이반한 도시는 공격하여 다시 로마 세력권에 편입시켰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로마와 동맹을 유지한 도시와 배신한 도시의 이유는 제각각으로 복잡하기 때문에 일괄적인 서술이 어렵다. 다만 칸나이의 대패를 보고도 대다수의 동맹시가 로마를 배신하지 않고 의리를 지킨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 칸나이 전투가 일어난 동맹시조차도 그 이후로도 동맹을 유지하며, 인접 지역의 방파제 역할을 했고, 한니발에게 넘어간 도시도 도시 내 친로마파가 다시 로마군을 끌어들여 로마 체제로 복귀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전쟁 종료 후, 로마 원로원은 배신한 동맹시에 대해서는 토지를 몰수하는 등의 엄중한 처벌을 집행했다.] 결국 한니발 군대는 겨우 얻은 이탈리아 반도 내 지지세력도 거의 잃고, 이탈리아의 장화 발부리 끝으로 몰렸다.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지원 병력 30,000명을 이끌고 스페인에서 북이탈리아로 진입하면서, 갈리아 부족들의 지원군까지 포함시켜 50,000명으로 전력을 강화하고, 한니발을 향해 남하했지만 먼저 기다리고 있었던 리비우스와 네로 휘하의 로마군 37,000명에 의해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전멸당하고 그 자신도 전사했다. 이로써 한니발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온 대규모 보급의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만일 이때 하스드루발이 성공적으로 합류했다면 전쟁이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애석하게도 하스드루발의 군재는 형의 발가락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한니발이 고립되고 전세가 호전되자 로마는 카르타고령 히스파니아를 평정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한 뒤,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 본국과 그 동맹국을 공격했다. 로마군은 연전연승하여 결국 누미디아 왕국[* 한니발 군대의 핵심인 기병의 대부분이 갈리아의 용병들과 누미디아의 기병들이었다.]까지 수중에 넣었다. 궁지에 몰린 카르타고 본국은 한니발에게 귀국 요청을 보냈고, 한니발은 피눈물을 흘리며 이 요청을 받아들여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카르타고로 귀국했다. 한니발은 [[자마 전투]] 직전 스키피오를 만나 화친을 제의했으나 거부당했고, 결국은 스키피오와 대결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패배하게 되었다. 결국 오랫동안 처절한 격전이 연이어 벌어졌던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자마 전투]] 문서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에스파냐를 얻었고 카르타고를 사실상 반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기원전 168년에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역시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한니발에게 당한 충격이 너무나도 엄청났던 로마는 제2의 한니발이 나올 것을 두려워해 카르타고를 철저히 탄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